[공지] <패션으로서의 우울증, 2010. 12. > (방명록 겸용) 지어낸 이야기

30번째로 제 블로그 링크하시는 분! 거기! 바로 당신!

뭐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복받으실겁니다.

블로그를 3월 26일에 개설하면서, 한 달 안에

그러니까 4월 26일까지 링크 30개 모으기가 목표였거든요.

전 공부하러 가볼게요. 헤헤. 또 너무 놀았네요.

<패션으로서의 우울증, 싸구려 폰카, 2010. 12. 신영주, Copyrightⓒ 2011. 신영주. All Rights Reserved.>

이 글이 왜 육아밸리로 보내졌는지 궁금하신 분은 태그를 유심히 보시길.

2011/04/19 Tue.

덧) 
저는 제가 우울증으로 고생한게 별로 부끄럽지는 않아요.
(아예 안 부끄러운 건 아니고. 조금 부끄러워요. 쪼끔!)
그래도 그거 아세요? 
"It is no measure of health to be well adjusted to a profoundly sick society." - Krishnamurti
2011/04/24 Sun.



블로그 프라이버시 수준 조절 - 잠수에 덧글 허용만 딱 해 놓기. 밸리 발행 금지. RSS공개 금지. 열공하자. 블로깅 고만하고ㅋㅋ
2011/05/07 Sat.


익명블로그의 비 익명화 & 블로그 박제(덧글 트랙백 차단)

문의 사항이나, 각종 컴플레인은 reminis68@gmail.com 으로

법적인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누군가들의 감정이 상하는 문제는 있을지도 몰라서 솔직히 조금 걱정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저의 진심인걸.
2011/05/26 Thr.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동아백과 - 힌두교

힌두교 [Hinduism]
요약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라문교(婆羅門敎)가 복잡한 민간신앙을 섭취하여 발전한 종교.
발리섬의 힌두교사원 / 인도네시아 소순다 열도에 있는 발리섬. 인도네시아는 주민의 약 4%가 힌두교도들이다.
본문

인도교()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산스크리트 명칭‘신두(Sindhu:)’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직업 ·종교적인 제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 ·주술, 열광적인 제의()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 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와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 ·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 · · ·)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와 그 은총은 능력 ·성별 ·직업 ·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잉여쾌락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스크랩/지식습득

잉여쾌락과 무소유
욕망은 신기루같아 결핍의 시대 자초해 … 법정스님의 무소유 삶 실천 뇌리에 남아

▲ 서울중랑구치과의사회 정현구 회장
[덴탈투데이/치학신문] 며칠 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시고 마지막까지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으셨던 법정스님의 다비식을 TV를 통해 보면서 오랜만에 잠시라도 세상의 욕망을 벗어버리고 싶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물질관이나 도덕관 혹은 사상적으로도 옳고 그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는 포스트모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 것인가.

요즘 우리세대를 가리켜 후기 산업사회이며 잉여쾌락의 시대라고 한다. 한마디로 물건이 넘치고 여분이 많이 있어도 생산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있어도 만족하지 않고 더 새롭고, 더 세련된 것, 더 편리한 것을 원하는 결핍의 시대이다. 미디어 광고에서는 매일 새로운 것에 대한 구매를 부추기며 우리를 유혹한다. 모양과 디자인만 바뀐 것이므로 내가 버린 물건과 똑같은 것을 사면서도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게 되었다. 공부하는 학생의 필통 속에는 필기구가 넘쳐도 또 구입하고, 영양 과잉으로 인한 살빼기 프로그램과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게 되었고, 어린아이들까지도 성인병을 앓고 있고, 지구촌 곳곳에는 쓰레기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는 산업의 발전으로 많은 혜택을 보기는 했지만 생명 경시, 조급함, 이기심의 극치인 자기 개인주의,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등의 부작용도 우리가 감당해야 되는 짐이 되었다. 더 좋은 것, 더 편리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정작 우리자신들의 일자리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계에 빼앗겨 버리게 되었고 우리들이 숨 쉬고 앉을 곳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쓰레기 더미에 자리를 양보해야 되는 실정이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 대한 양면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우리의 사회가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의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한계를 넘어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빈 껍데기’를 추구하고 찾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의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신기루와 같아서 대상이 멀리 있으면 아름답고 커서 그것을 꼭 잡아야 될 것 같은 조급함이 생기지만 일단 우리 손에 잡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찾게 만드는 탄산음료와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 욕망이란 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내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한번쯤 가져 보았으면 한다.

풍족하지만 끊임없이 목말라 하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법정스님의 ‘무소유’ 삶의 실천은 현대인의 욕심에 대한 브레이크를 잡아야 됨을 알려 주신 것 같다.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유란 생활하는데 필수 요건이지만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는 욕심이 아니라 주위 사람이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 환경에 관심을 갖고 나누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지식, 의술, 남에 대한 배려 등 조그만 부분이라도 이웃과 나누며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것이 요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생기는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는지 염려스럽다. 우리의 삶에서 과도한 욕심으로 인한 쓸 데 없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절제하면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속세에 사는 우리가 누리는 무소유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출처: 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45025

[출처] 슬라보예 지젝의 잉여쾌락, 그리고 무소유 |작성자 KEY





==========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나는 되게 통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근대의 서양철학들 중에서도 서구권의 정신분석학은

노자나, 장자, 한국으로 치면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가들의 사상과 정말 밀접히 닿아 있는 그런 느낌.

가끔씩 읽다가 여기서 나온 얘기가 저기서 또 나오면 깜짝 깜짝 놀란다. 소름 끼쳐서.

서구권의 철학자들이 사실은 막 몰래 몰래 노자, 장자, 불교 경전, 우파니 샤드, 브라마나, 수트라 같은 힌두교 경전을 엄청 열심히 읽는 거 아닐까?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슬라보예 지젝과 잉여쾌락 스크랩/지식습득

슬라보예 지젝과 잉여쾌락


라캉과 마르크스
,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 서유럽 학자들이 '동유럽의 기적'으로 지칭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1949년 옛 유고연방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파리 제8대학의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 류블랴나에서 `이론정신분석학회` 를 창립, 회장으로 일했으며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현실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1990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지젝은
""욕망이 대상의 고유 가치와 교환 가치의 차액인 잉여 쾌락에 의해 지속된다""잉여쾌락 이론, 실재계와 상징계 등을 제시했다.


잉여쾌락은 마르크스의 상품분석에 나오는
잉여가치
를 정신분석에 차용한 개념이다. 잉여가치란 자본과 노동력의평등한 교환이란 형식을 통해 자본가가 취하는 잉여의 내용물이다. 자본주의적 교환은 잉여가치에 의해 지속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결코 닿지 않는 근원적 욕망을 향한 추구를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막상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실체는 텅 빈 껍데기로 남아욕망과 미끄러지면서결핍을 낳는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이 곧잉여쾌락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에너지.


한편 라캉은 인식차원을 실재계
, 상상계, 상징계로 나눈다. 상상계는 원초적이며 즉자적인 유아기적 인식세계이며, 상징계는 무의식이 질서와 언어로 구조화된 체계다. 상상계와 상징계, 무의식과 의식을 묶어주는 것이 바로 잉여쾌락이자 실재계이다. 잉여쾌락이 정도를 넘어서면 주체를 잡아 삼키고 파괴와 죽음을 부른다. 지젝은 실재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파시즘이나 도착증을 막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였다.


또 영화를 축으로 독특한 문화 비평을 잇따라 내놓아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다
.


주요 저서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 <삐딱하게 보기: 대중 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1991), <부정태와 함께 체재하기: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1993),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셸링과 제 문제에 대한 에세이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1996)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ywood and out>(1992)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Lacan(But Were Afraid to Ask Hitchcock)>(1992) 등이 있다.



출처: http://terms.naver.com/item.nhn?dirId=708&docId=9580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ㅡ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 슬라보예 지젝 / 도서출판b

슬라보예 지젝의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1993)>를 완역한 책. 지젝은 칸트와 헤겔이라는 독일관념론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주체의 이론을 정교하게 구성해내고 있으며, 이를 이데올로기 이론에 적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젝은 완결적인 방식으로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 이 작업은 책의 1부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지젝은 이론이 포괄해야 할 영역을 확장시킨다. 특히 자신의 동료 조운 콥젝의 선구적 연구를 이어받아,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주체의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2부에서 지젝은 헤겔의 논리학을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재해석한다. 이 작업은 알튀세르를 겨냥하고 있다. 지젝은 여기서 헤겔에 대한 정교한 독서를 통해 어떻게 헤겔의 논리학이 이미 알튀세르가 헤겔을 비판하기 위해 정교화했던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지 증명한다. 1부와 2부에서 주체의 이론과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교하게 제시한 이후에, 3부에서 지젝은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문제를 다룬다.

<책 목차>

서론

1부 코기토: 주체라 불리는 공백
1. "사고하는 '나' 또는, '그것'(사물)"
2. 코기토와 성적 차이

2부 에르고: 변증법적 부당도출
3. 근본악 및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
4. 이데올로기 이론으로서의 헤겔의 "본질의 논리학"

3부 숨:향유의 원환고리
5.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6.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

옮긴이 후기
인명 색인

-------------------------------------------------------------------------------------

이글은 구양봉옹 님의 글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라는 인터넷 글입니다.

-------------------------------------------------------------------------

현대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뒤이어 정신분석학의 힘을 가장 야심차게 (재)확장해놓은 슬라보예 지젝(1949~ )이 바로 그 이름이다.

아마도 이 선입견은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라는 강단 철학자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젝이 자신의 논의를 설명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예(특히 할리우드 영화, 심지어는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트까지!)를 많이 들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현대사상가들에 ‘비해’, 즉 ‘상대적으로’ 그러한 뿐이다.

이 점은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를 읽을 때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지젝은 <토탈 리콜>, <엔젤 하트>, <블레이드 러너>, <더티 해리> 같은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곳곳에서 하지만, 그보다 백배는 더 많은 지면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에 이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고,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중심으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6장의 핵심 테마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이다. 이 테마는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압축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비판이론의 궁극적 테마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젝은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철저히 ‘재현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은 어떤 사회적 내용(가령 현실의 지배구조)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정의되면, 우리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한때 우리는 이 과정을 ‘의식화’로, 그 결과물을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현의 문제틀로서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해할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곧 이데올로기)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지젝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젝은 ‘체화된 향유’로서의 ‘어떤 사물’이 바로 그런 요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설명하는데, 이때 그가 기대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아니, 오히려 지젝 식으로 해석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라캉에 따르면 ‘향유’(juissance/enjoyment)란 쾌락(plaisir/pleasure)이 아니다. 향유와 쾌락을 동의어로 쓰곤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가령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라캉은 욕구(besoin/need)와 요구(demande/demand)를 구분하며 각각의 개념에 쾌락과 향유를 대입한다. 가령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경우 배고픔이라는 생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식욕의 빨기’(succion)가 아니라 ‘쾌감의 빨기’(suçotement)를 한다. 이렇듯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도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유는 쾌락의 초과, 위반, 잉여이다. 또한 과도한 쾌락은 불쾌(고통)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쾌락 이상을 추구하는 향유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쾌감의 빨기는 아기가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곤 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곧 중단된다. 즉 젓 떼기를 하는 것이다. 아기는 잃어버린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쾌감의 빨기’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이제 어머니의 젖꼭지는 “기다려 보지만 항상 결핍된 것”,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캉은 이를 ‘대상 a’(objet petit a/object little-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바의 ‘사물’(La Chose/the Thing)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가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한다는 지젝의 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반복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즉 향유)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 준다는 말인데, 그에 따라 지젝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위상 자체도 변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담론구성체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도 ‘사물’(대상 a)을 얻지 못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 답변이다. 그래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는 환상(fantasy)의 구성물에 가깝다.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설명틀을 확장해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탈바꿈시킨다. 가령 한 사회는 그만의 ‘대상 a’(사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일수도, 민족일수도, 계급일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들, 요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보통선거권이 인정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계급의 경계가 생각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즉 민주주의, 민족, 계급은 아직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 a’(사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결코 완벽히 소유한 적 없는 민주주의, 민족, 계급의 이름으로 대규모 전쟁(내전이든 국제전이든)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젝이 “향유의 도둑질”의 역설, 즉 우리의 사물이 타자에게 접근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간주(왜냐하면 우리의 사물은 타자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므로)되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우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을 타자가 위협한다)는 역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의식화나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대상 a’(사물)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혹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향유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인 환상(판타지)을 찢어발기거나. 파시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건국의 아버지 모세가 이집트인임을, 즉 유대인의 기원이 잡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전자의 경우라면, 지젝의 작업이 바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은 “예외된 한 사람”(homme moins un)이 되는 것일 게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 신화를 설명한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으면서, 거세 위협에 복종한 아들들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논리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아들이 ‘적어도 한 사람’(au moins un)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라캉은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이 적어도 한 사람”을 “예외된 한 사람”(오모엥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오모엥젱들이 연대할 때 기존의 지배질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오모엥젱들을 묶어줄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젝은 아직 이 질문에 답을 해주진 않고 있으나 여하튼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지젝의 최근 작업은 혁명가들을 다시 읽는 ‘혁명’ 시리즈,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오늘날, 동시대의 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대결하며 기발한 해결책을 제안한다”고 예고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다). 우리가 아직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끝)

공유하기 버튼

 
싸이월드 공감트위터페이스북

1 2 3 4 5 6 7 8 9 10 다음